그해, 여름 손님. Call Me By Your Name

p. 19

우리는 서로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전부터 신호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날 저녁 일기에 내 마음을 적었다. 당신이 그 곡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고 한 말은 과장이었어요. 내가 진짜 하려는 말은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는 거였어요. 당신이 반대로 나를 좋아한다고 납득할 만한 행동을 보여 주기를 바랐죠. 잠깐 동안 당신은 정말로 그랬어요. 하지만 내일 아침에는 내 생각이 또 바뀌겠지요.

 

얼음에서 햇살로 단번에 바뀌는 그를 보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처럼 왔다갔다 했나?

 

추신: 인간은 하나의 악기만을 위한 곡으로 쓰이지 않았어요. 나도, 당신도.

 

나는 그동안 그를 다가가기 힘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기꺼이 단정 지었고 더 이상 볼일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의 단 두 마디에 내 쀼루퉁한 무관심이 바뀌고 말았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 주는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 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여름을 눈보라 속으로 가져가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p. 26

나는 여러 가지를 부정할 수 있었다. 독특하게도 햇살을 받아 끈적이는 광택으로 빛나는 그의 무릎과 손목을 만지고 싶었다는 것. 그의 하얀 테니스 반바지에 항상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진흙색 얼룩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피부색으로 바뀌고 매일 더 진한 금색으로 변하는 머리카락이 아침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의 햇살을 받았다는 것, 돌풍 부는 날 수영장 옆 파티오에 서 있는 그의 펄럭거리는 파란색 셔츠가 더욱 펄럭거리고 살과 땀 냄새를 풍기며 생각만으로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부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정을 사실로 믿었다.

 

p. 41

내가 푹 빠지면 상대방도 푹 빠진다는 법칙이 어딘가에 있다. Amor ch'a null'amato amar perdona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지옥>편에서 프란체스카는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희망을 갖고 기다려 보자. 나는 희망을 가졌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은 영원히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p. 46

하지만 마팔다는 이미 올리버의 편이 되어 있었다. 그가 우리 집에 머문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마팔다가 주스를 권하자 좋다고 했다. 그는 오렌지주스나 자몽주스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것은 커다란 유리잔을 가득 채운 진한 살구주스였다. 그는 살구주스를 마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팔다는 은쟁반을 앞치마에 딱 붙이고 서서 살구주스를 들이켜는 그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자신의 입술을 때렸다. 아마 자기도 모르게 그랬을 것이다. 마팔다는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세계적인 명문 대학의 교수라는 사람이 살구주스를 마시고 입술을 쳤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아침마다 살구주스 한 잔이 그를 기다렸다.

그는 살구나무가 다른 곳도 아닌 우리 과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어리둥절해했다. 늦은 오후 마팔다는 집 안에 할 일이 없으면 그에게 바구니를 들려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부끄러움에 낯이 붉어진 살구를 따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탈리아어로 농담을 던진 뒤 살구 한 알을 따서 그녀에게 물었다. "부끄러움에 낯이 붉어진 게 맞나요?" 마팔다는 아니라고, 그건 너무 어리다고, 어릴 때는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성숙하면서 느끼는 거라고 대답했다.

 

p. 55

나는 그가 우리 집을 빨리 떠나서 모든 게 끝났으면 했다.

차라리 그가 죽었으면 하기도 했다. 계속 그가 생각나고 언제나 볼지 알 수 없는데 적어도 그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내 손으로 그를 죽이고 싶기도 했다. 그의 존재가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누구든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태평함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남들처럼 해안으로 이어진 문을 열지 않고 뛰어넘는 것도 거슬린다고. 수영복과 수영장가의 천국, 장난스러운 '나중에!', 입술을 때릴 정도로 좋아하는 살구주스도, 그를 죽이지 않으면 불구로 만들어 미국으로 돌아갈 필요 없이 휠체어를 타고 평생 우리 집에서 살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가 휠체어에서 생활하면 항상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고 찾기도 쉬울 테니까. 그가 불구가 된다면 나는 그의 주인이 되어 우월함을 느낄 터였다.

 

p. 65

야곱이 라헬에게 물을 달라고 한 뒤 그녀에게 예언이 된 말을 듣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우물가 땅에 입 맞추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도 유대인, 첼란도 유대인, 올리버도 유대인이고, 우리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세상에서 절반은 유대인 거주지, 절반은 오아시스에 있었다. 이방인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갑자기 멈추고 마음을 잘못 읽는 일도, 남들에게 오해받는 일도 없으며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아서 친밀함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 유대인 추방이나 마찬가지인 곳. 그렇다면 그는 내게 귀향을 의미하는 존재인가? 올리버, 당신은 내게 귀향이에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더 이상 원할 게 없어요. 당신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만들어요. 세상에 진실이 존재한다면 내가 당신과 함께 하는 순간에 존재할 거예요. 언젠가 용기를 내어 내 진실을 당신에게 전한다면 감사의 의미로 로마의 모든 제단에 촛불을 밝히라고 해 주세요.

그의 한마디에 행복해질 수 있다면 쉽게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불행해지고 싶지 않으면 그런 작은 행복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p. 87

그의 긁힌 자국을 만지고 쓰다듬고 사랑해 주고 싶었다.

시내로 향하면서 올리버가 천천히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상시대로 속도를 내지도 않고 운동선수 같은 열정으로 오르막길을 힘껏 오르지도 않았다. 빨리 원고 작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색도, 친구들이 있는 해변으로 가거나 평상시처럼 나를 외면하려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달리 할 일이 없는 걸 수도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 순간이 천국이었다. 아직 어렸지만 그런 순간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있는 그대로 즐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와의 우정을 단단히 하거나 다른 차원까지 끌어올리려는 어설픈 시도로 망치지 말고. 결코 우정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첼란의 표현처럼 항시와 전무 사이(Zwischen Immer und Nie).

 

p. 97

나를 쳐다보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생긴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평상시라면 그가 나를 보는 순간 시선을 돌렸으리라.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맑은 호수 같은 그의 사랑스러운 눈동자에서 헤엄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가 내 시선이 머무는 걸 원하는지 확인할 만큼 오래 쳐다볼 수도 없었다. 상대방을 똑같이 빤히 쳐다보는 게 두려워서 시선을 돌렸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시선을 돌렸다. 그가 그토록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시선을 돌렸다. 강철처럼 차가운 그의 눈빛이 우뚝 서있는 그에 비해 한없이 낮기만 한 나 자신을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은 침묵 속에서 나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반항하기 위해서도, 더 이상 수줍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굴복하기 위해서, 이게 바로 나이고 이게 바로 당신이며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이고 지금 우리 사이에는 오로지 진실만이 자리하고 진실이 있는 곳에는 장벽도 급하게 돌리는 시선도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설령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 사이에 놓인 가능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고. 내게는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서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몸짓을 통해 도전과 도피를 동시에 표현하는 사람의 다 안다는 듯한, 감히 키스해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p. 134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하나도 아닌 두 가지 괴로움이 잠의 안개에서 형체를 드러낸 한 쌍의 유령처럼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욕망과 수치심.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알몸으로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욕망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위험을 조금도 무릅쓰지 못하는 반복된 무능함. 젊음의 유산이자 내 삶의 두 가지 마스코트인 갈망과 두려움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기회를 잡아서 보상을 얻은 사람도 많은데 왜 넌 그러지 못하는 거야? 답이 없다. 수많은 사람이 그랬듯 왜 너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거지? 역시 답이 없다. 역시나 나를 비웃는 말이 나왔다. 엘리오, 나중이 아니라면 언제 할 거야?

 

p. 144

"넌 책이 그렇게 좋아?" 어둠 속에서 광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마르지마가 물었다. 음악이나 빵, 소금 들어간 버터나 잘 익은 여름 복숭아를 좋아하느냐고 물은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마. 나도 책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진 않아." 마침내 독서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는구나 싶었다. 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지 물었다. "몰라..."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거나 답하기 전에 얼버무릴 때 마르지아가 즐겨 하는 말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숨기는 게 있어. 자신을 숨기거든.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

 

p. 155

작은 만으로 향하기 전에 그가 나와 마르지아의 관계를 알아도 상관없고 오늘 밤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한번 기분이 좋아졌다. 그도 그의 어깨도 팔뚝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의 발바닥, 손바닥, 아랫도리 다 상관없었다. 차라리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고 마르지아와 있으면서 자정을 알리는 소리에 그가 약속 운운하는 말을 듣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가 오늘 밤 모습을 드러낸다면 지금은 내키지 않더라도 결국 나는 우리 앞에 벌어질 일에 온몸을 던질 것이다. 여름 내내, 아니 평생 내 육체와 싸우느니 끝장을 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냉정하게 결정 내릴 것이다. 그가 묻는다면 말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일인지 확신은 없지만 확인해 보고 싶고 대상이 그였으면 좋겠다고. 당신의 몸을 알고 싶고 당신이 어떻게 느낄지 알고 싶다고. 당신을 통해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당신을 알고 싶다고.

 

p. 159

하지 마, 하지 마라, 엘리오.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할아버지는 벽보다 훨씬 험악한 생사의 갈림길을 건넌 바로 그 침대에서 나에게 말했다. 돌아가. 네가 저 방으로 들어가서 뭘 발견할지는 모르는 일이야. 발견이라는 강장제가 아니라 절망이라는 관일 수도 있어. 세월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오늘 밤에 보이는 별들은 이미 네 고통을 안단다. 오늘 네 조상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말하고 있구나. 가지 마.

하지만 나는 두려움이 좋았다. 정말로 두려움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조상들은 내가 두려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두려움의 밑면이었다. 양털은 배 부분이 가장 부드러운 것처럼. 나를 밀어붙이는 대담함이 좋았다. 흥분되었다. 두려움은 흥분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멈춘다면 난 괴로워 죽을 거야.' 아니, '당신이 멈춘다면 난 괴로워 죽을 거예요.' 이거였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p. 195

내일 아침 일찍 수영을 하러 간다면 지금 과도하게 넘치는 자기혐오를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기혐오에 익숙해지기도 하는지 궁금했다. 아니면 누적된 불안이 너무 커서 유예 기간을 가진 한 덩어리 감정으로 압축시키는 것일까? 어제만해도 침입자처럼 느껴지던 타인이 내가 지옥에 빠지는 걸 막아주는 존재가 되는 걸까? 새벽에는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밤에는 그 고통을 없애 줄 사람이 되는 것일까?

 

p. 199

나는 수 주일 동안이나 그의 시선을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오해했다.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그의 시선은 상대방의 시선을 잡아 두려는 수줌음 많은 남자의 방식일 뿐이었다.

마침내 깨달았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수줍음 많은 두 남자였다는 사실을.

 

p. 202

몇 시간 후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잠깐 장난친 것을 만회하려는 듯 날씨가 가을의 암시를 모조리 거두며 가장 온화한 여름 날씨를 선사했다. 하지만 나는 날씨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였다. 채택될 수 없는 증언을 기록에서 삭제하기 전에 전해 들은 배심원처럼 갑자기 우리가 빌린 시간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항상 시간을 빌리면서 살아가며 갚을 준비가 덜 되었고 더 빌려야 할 때 할증료를 요구받는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모습을 머릿속에 담기 시작했고 탁자 아래로 흘린 빵 부스러기를 주우며 은신처를 준비하고 부끄럽게도 목록을 만들었다. 해안의 바위, 모네의 언덕, 침대, 재떨이 소리... 총알이 바닥나자 다시는 쓸 일이 없다는 듯 총을 버리는 영화 속 군인이나 물을 아껴 가며 마시지 않고 한 번에 갈증과 더러움을 없앤 뒤 물병을 버리는 사막의 도망자가 되고 싶었다.

그 대신 작은 것들을 조금씩 아껴 두었다. 먼 훗날 힘들 때 과거의 희미한 불빛이 온기를 전해 주기를 바라면서. 내키지 않은 듯 미래에 내가 물어야 할 빚을 현재에서 조금씩 훔쳐 내 갚기 시작했다. 햇살 가득한 날 덧문을 닫는 것만큼이나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신에 의지하는 마팔다의 세상처럼 최악을 기대하는 것이 최악을 막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도 알았다.

 

p. 211

우리 사이에 그 어떤 비밀도 칸막이도 없었으면 했다. '내 육체가 곧 네 육체'라고 맹세할 때마다 우리를 더욱 끈끈하게 이어 주는 솔직함을 즐길 때마다 내가 예상치 못한 수치심의 자그만 불꽃이 다시 불붙는 것을 즐기고 있음은 알지 못했다. 어두운 게 낫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정확히 빛을 비춰 주었다. 외설이 소비되고 우리의 육체에 더 이상 교묘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아도 친밀함이 계속 남을 수 있을까?

내가 그때 그런 질문을 떠올렸는지 모르겠고 지금 그 답을 아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친밀함은 잘못된 통화로 지불되었던 걸까?

 

p. 223

"방콕에서는 계속 로마가 생각났습니다. 길가의 이 작은 서점과 해가 저물기 직전의 주변 거리, 부활절이나 비 오는 날에 울려퍼지는 교회 종소리가 떠올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죠. 루치아, 이런 날이면 당신을 그리워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세상을 떠난 오비디우스처럼 공허해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나를 말리지 않았소? 나는 바보인 채로 떠났고 돌아올 때도 더 지혜로워지지 않았습니다. 타이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술을 좀 마시고 지나가는 사람을 만지기 직전의 외로움은 너무도 잔인한 것이 됩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지만 술 한잔으로 미소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시인은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잠시 멈추었다. "나는 이 시들을 트리스티아 (비가)라고 불렀습니다."

 

p. 232

어쩌다 보니 방콕이 화제 올랐다.

"다들 아름다운에 여러 가지가 혼합된 아름다움이죠. 그곳에 또 가고 싶어요." 시인이 입을 열었다. "아시아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죠. 유라시아인은 너무 단순한 호칭이고. 그곳 사람들은 가장 순수한 의미로 이국적이면서 생경하지 않아요. 한 번도 본적 없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그들이 내 마음을 휘저어 놓는 것이나 무엇을 원하는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죠."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다르게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다르게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죠. 말할 수 없이, 상상도 할 수 없이 다정하다는 것도 알아챘고요. , 우리도 열정적인 지중해 사람의 방식으로 친절하고 다정하고 따뜻할 수는 있죠.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사심 없이 온 마음으로 온몸으로 다정합니다. 아무런 슬픔이나 악의 없이 다정하고 아이처럼 아이러니나 수치심 없이 다정하지요. 내가 그들에게 가졌던 느낌이 부끄러워졌어요. 내가 꿈꿔 온 천국이 바로 그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 (중략) ... 나는 타이의 모두와 자고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타이의 모두가 나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더군요. 휘청거리며 사람들한테 부딪히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떼기가 힘들었어요."

 

p. 245

가끔 가다 불을 밝힌 거리의 텅 빈 미로를 따라 걸으면서 나는 시인의 산클레멘테 이야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인지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간을 따라 움직이고 시간도 우리를 따라 움직이며 우리는 변화를 거듭하다가 똑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늙을 때까지 무엇 하나 배우지 못해도 이것만은 배운다. 이것이 시인의 가르침이라고 추측했다. 한 달 후든 언제든 로마를 다시 찾는다면 오늘 일이 완전히 다른 나에게 일어난 일인 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또한 3년 전 식료품점 직원이 삼류 영화관에 가자고 제안했을 때 생겨난 내 바람은 지금부터 3개월 후에도 3년 전과 똑같이 충족되지 않은 듯 느껴질 것이다. 그는 왔다 갔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도 바뀌지 않았다. 세상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똑같지 않을 것이다. 꿈을 만드는 것과 낯선 추억만 남았다.

 

p.262

매일 밤 그를 내 옆에, 내 안에 두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면 그때는 어떡하나?

고통이 닥치기 전에 먼저 고통을 떠올렸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자면서도 알고 있었다. 넌 면역력을 기르려고 하는 거다. 이런 식으로는 전체가 다 죽고 말 거야. 교활한 녀석 같으니. 넌 교활하고 비정한 녀석이다. 나는 그 목소리에 미소 지었다. 이제 내 몸에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땅에 대한 토속 신앙에 가까운 마음으로 태양을 사랑했다. 내가 그토록 땅과 태양, 바다를 사랑하는지 몰랐다. 사람과 사물, 심지어 예술마저도 그다음인 듯했다.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걸까?

 

p. 273

"Parce que c'etait lui, parce que c'etait moi(그가 단지 그이기 때문에, 내가 단지 나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덧붙였다. 몽테뉴가 에티엔 드 라 보에티와의 우정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나는 에밀리 브론테의 말을 떠올렸다. '그가 나보다 더 나와 닮았기 때문에.'

 

p. 274

"얘야." 아버지가 가로막았다. "너희 둘은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어. 우정 이상일지도 모르지. 난 너희가 부럽다.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냥 없던 일이 되기를, 아들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랄 거다. 하지만 난 그런 부모가 아니야. 네 입장에서 말하자면, 고통이 있으면 달래고 불꽃이 있으면 끄지 말고 잔혹하게 대하지 마라. 밤에 잠 못 이루게 하는 자기 안으로의 침잠은 끔찍하지. 타인이 너무 일찍 나를 잊는 것 또한 마찬가지야. 순리를 거슬러 빨리 치유되기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뜯어내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결핍되어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시작할 때 줄 것이 별로 없어져 버려. 무엇도 느끼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하는 건 시간 낭비야!"

 

p. 290

"내 거였는데 당신이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네요." 우리는 서로의 것이었지만 너무도 멀리 떨어져 살았고 이제는 다른 이의 것이었다. 우리 마음의 진짜 주인은 무단으로 점유한 사람뿐이었다. "역사가 깊죠."

 

p. 297

"엽서 뒷면에 뭐라고 썼어요?"

"놀라게 해 주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컸어요. 게다가 놀라움은 항상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지고 나타나서 아프거든요. 난 당신 때문에 아프고 싶지 않아요. 그냥 말해 줘요."

"두 단어야."

"한번 맞혀 볼게요. 나중이 아니면 언제?"

"두 낱말이라니까. 게다가 그 말은 너무 잔인하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포기할래요."

"Cor cordium(마음 중의 마음). 누군가에게 이렇듯 진실한 말을 하는 건 처음이야."

 

 

p. 306

"나도 너와 같아. 나도 전부 다 기억해."

나는 잠시 멈추었다. 당신이 전부 다 기억한다면, 정말로 나와 같다면 내일 떠나기 전에, 택시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이 삶에 더 이상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장난으로도 좋고 나중에 불현듯 생각나서라도 좋아요,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테니까, 나를 돌아보고 얼굴을 보고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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