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와의 랑데부 일상

6월 들어 폭풍우같았던 학기말 카오스가 모두 지나가고 아주 한가한 여름방학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어느덧 지금 학교를 다닌지도 6개월이 넘어서고 있다. 이직하기 전까지 합하면 학교라는 조직에서 벌써 1년이나 보낸 셈이다. 
객관적으로 대단한 것은 아닌데 나같은 프로이직러(라고 쓰고 인내심 제로라고 읽는다)가 어쨌든 반년을 버텼다는 건 좋은 징조같다. 실제로 방학에 들어서서 학생들 얼굴을 안보니 이런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점차 사람을 대면하는 것을 꺼리게 되면서, 극단적으로 거의 10년 전의 나와 비교를 하면 원래 이렇게까지 사람을 대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고 멘탈도 훨씬 강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충격적인 일이 있어도 유연하게 대처했던 것 같은데 이게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점차 사람을 피하면서 멘탈도 점점 약해진 건지 점차 부정적인 자극에 대한 역치가 낮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일부러 사람과 부딪혀서 굳은살 박히듯 멘탈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가? 그걸 좋은 일이라고는 못하겠지만
과연 온실 속 화초가 내가 바라는 삶인가? 하는 질문에 또 선뜻 '그렇다'라고 못하겠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두 가지의 삶이 양 극단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고 단순하게만 말할 수는 없겠다만, 여하튼 무엇이 확실히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어른이 된다는 것, 혹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 좋고 나쁘고를 흑백으로 가를 수 없는 애매모호함을 매순간 견디고 살아야만 하는 것 같다.

최근의 나는 흥미로운 사람도 만나 실연도 겪고 동시에 자괴감도 보너스로 얻은 일이 있었다. 이 실연 사건은 그냥 나의 호감을 거절당한, 노래 가사로도 못 쓸 수준의 실연이었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이 사건은 내 존재(?)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갖게끔 하는 정도의 임팩트를 남겼다. 이 사람에게 엄청나게 빠졌는데 실연해서 자괴감이 든 것이 아니라, 우습게도 그 사람에 비해서 내가 너무 황당할 정도로 평범해서, 한마디로 비범한 사람의 후광에 압도 당해서 극심한 우울감에 빠졌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난 그럭저럭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불가촉천민급이 아닌가 하는 불경한 자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기분은 분명 특별한 감정은 아니겠지.

특히 이 사람이 혼란스럽게 느껴졌던 건, 나에게 관심이 없으면 일적으로 얽혀있다던지 하는 까다로운 관계도 아니니 그냥 차단한다던지 무시하면 되는데 기여코 먼저 연락을 해서 날 착각하게 만들고, 기여코! 두 번째 만남에 응해서 굳이 약속장소에 꾸역꾸역 나와 나를 소, 닭 보듯 하다 헤어졌다는 점이다. 어장이라기엔 너무 명확히 나에게 관심이 없어보였고 여지를 주는 듯한 언행은 일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만남이 성사된 것은 실로 미스테리인게, 굳이 본인 입으로 프로거절러라 말한 적도 있고 척 봐도 대쪽같은 성격이기 때문에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라 그랬다기엔 여러모로 어폐가 있었다. 본인도 관심없는 이성이랑 몇 시간을 떠들고 영화도 볼라면 고역이었겠지만 왜, 왜, 왜!!!!! 그때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아서 서로 힘든 상황을 만들고 쓸데없이 사람 헷갈리게 만드냐고요? 어쨌든 두 번째 만남 이후로는 예의차린 연락도 오가지 않았으니 이제는 정녕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자괴감에 휩싸여 과거의 멍청한 나에 대한 후회와 연민이 끝도 없이 휘몰아칠 때 그나마 제정신을 차리게 해준 것이 'mindfulness' 라는 개념이다. 이걸로 구원을 얻었어요! 이런 것 까진 아닌데 잠깐 미쳐가는 마음과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 mindfulness는 별 게 아니고 그냥 미래나 과거보다 지금 당장 현재에 집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과 비스무리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할 때, 텔레비전을 시청한다거나 다른 활동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행위, 음식의 맛과 향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며 생각을 비운다. 이 개념에 대해 들으면서 그래, 과거는 어차피 바꿀 수 없고 미래에 대한 걱정의 80% 이상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라는 예전에도 수없이 되뇌였지만 어느새 또 까먹어버린 사실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면서 마음이 아주, 아주 조금 차분해졌다. 나는 현재에 집중해서 그냥 지금 목전에 닥친 일을 최선을 다해 해결하고 살아가면 돼. 어차피 출발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은 하등 고려의 가치도 없는 생각이야.

그래도 조금 생산적으로 이 절망의 감정을 승화시키고자 일단 밀린 책을 하나 둘씩 퀘스트 클리어 하듯 해치우는 걸로 정신을 좀 분산시키며 그렇게 어젯밤 라마와의 랑데부를 해치웠다. 돌이켜 보니 얼마나 시기적절한 선택이었는지, 간만에 나에게 바다와 같이 깊고 깊은 자괴감을 가져다 준 저 잘난 남자는 마치 라마 같았다고 기억될 지도 모르겠다. 너무 번쩍번쩍 빛나서 나도 모르게 홀렸다가 좀 들여다볼라 했더니 허무감만 남기고 쌩하니 사라져버린 강렬한 미지의 남자여. 실로 라마와의 랑데부다. 라마같은 새끼... 만나서 혼란스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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